ROCK TOWN

Nirvana (너바나)에 대해서 알아보자!

스타일리스트제이 2020. 1. 30.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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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코베인, 크리스 노보셀릭, 데이브 그롤의 3인조라는 최소 편성으로만

이루어진 너바나는 대중화 된 펑크, 포스트펑크, 인디 록 등 이전까지 레코드 숍

한켠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거의 상품가치를 얻지 못했던 얼터너티브를

주류로 몰고 간 유일한 밴드 입니다.

너바나 전원

이들의 음악은 어릴 적 부모의 이혼으로 불우하고 혼돈 된 시기를 보냈던 커트코베인의

영향으로 현실에 대한 분노, 좌절, 삶에 대한 자조 어린 평가들을 파격적인 펑크 록을

통해서 분출하고 있습니다. 8살 때 부모의 이혼으로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비틀즈와

헤비메탈 음악을 막막한 삶의 유일한 돌파구로 삼았던 커트 코베인은 미국 하드코어 펑크에

매료되고 언더그라운드 헤비펑크 밴드인 멜빈스에서 연주 생활을 시작 합니다.

 

멜빈스의 리더였던 버즈 오스본을 통해서 크리스 노보셀릭을 만나 스티프 우디즈라는

밴드를 결성하고 코베인은 드럼, 노보셀릭은 베이스, 기타와 보컬은 필요시 영입하는

방식으로 연주를 시작합니다. 후에 보컬과 기타를 코베인이 담당하면서 스키드로우로 

이름을 바꾸고 아론버크하트를 드러머로 기용 했고, 후에 채드 채닝으로 교체하면서

그룹 이름을 너바나로 확정 짓습니다. 잭 엔디노의 프로듀서로 10곡의 데모를 녹음한

너바나는 1988년에 첫 싱글 'Love Buzz' 를 선보여 인지도를 높인 후, 1989년 데뷔앨범

'Bleach' 를 발매하게 됩니다. 단돈 6백 달러를 들여 만든 이 앨범은 대학 라디오 방송을

타고 전파되어 3만5천 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평론가들로부터 높은 음악성을 인정 받으면서

메이저 레이블의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기타치고 있는 커트 코베인

1990년 DC기반의 하드코어 밴드인 스크림에서 활동하던 드러머 데이브 그롤을 맞아들여 제대로

진영을 갖춘 너바나는 메이저 레이블인 게펜사(Geffen)와 계약한 후 2집 녹음에 들어갑니다. 

물 속에서 아기를 낳는 TV다큐멘타리에서 착안, 거기에 지폐가 걸린 낚시 바늘을 첨가시킨 커트의 

냉소가 엿보이는 앨범 자켓의 2집 [Nevermind]는 격렬한 4코드 진행이 돋보이는

'Smells Like Teen Spirit' 의 역사적인 히트에 힘입어 앨범차트 1위에 등극하였고, 트리플 플래티넘의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2집 발표 후 투어 공연을 가진 너바나는 공연장에서도 독특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는데, 거의 매 공연마다 악기를 던지고 장비를 부스는 등 거칠고 과격한 행동을 통해

그룹 이미지를 굳혀갔고, 미발표 곡 들을 모은 편집 앨범인 [Incesticide]로 인기를 지속시켰습니다.

네버마인드 앨범자켓

그러나 언더그라운드에서 갑작스런 오버그라운드로의 선회와 폭팔적인 인기, 앨범의 성공을

누리기에 이들은 너무 순수했으며, 상업주의 적인 매스컴의 유혹과 주위의 비판을 헤로인

복용으로 감당할 수 밖에 없는 여린 사람들일 뿐이였습니다. 1993년 9월, 예전 [Bleach] 발표

당시의 순수한 펑크로의 회귀를 상징하는 [In Utero]는 발매와 동시에 US UK 차트 석권했고,

평론가와 대중들의 아주 높은 관심을 끌었습니다.

앨범 자켓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과 밴드의 명성이 드높아짐에 따라 리더인 커트 코베인의

정신적인 질환과 갈등도 커져 갔고, 약물과용으로 몇 번의 혼수상태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결국 그는 권총자살을 시도하고, 1994년 4월 8일 그의 집에 경보장치를 설치하러 온 전기공에 의해 

시체로 발견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처럼 해탈하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펑크의 순수성을

지키려 했던 커트 코베인의 의도도 사후에 발매 된 수많은 상술적인 트리뷰트성 앨범과

라이브 앨범으로 무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굳이 거짓 신봉자에 의한 우상화 작업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커트 코베인과 너바나의 음악이 X세대의 대변인이자, 고통받는 염세주의의

상징임은 영원히 록 음악사에 기록 될 것 입니다.

 

FOREVER NIRV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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